6월 6일 현충일
아침에 일어나서 뉴스를 보다가 문화행사란에
임시수도기념관에서 1950년 부산엘레지를 한다고
해서 가보고싶었던 곳이라
운동겸 그곳을 찾았다.
1950년 전쟁 발발시 이곳 부산이 임시수도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했던 역사적인 장소여서 꼭 한번은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가는 거리에 현수막으로 행사를 알리고 있다.
어렵게 살았을 그때..
사진 한장만으로도 그때의 삶을 다 보여주는 것같은
아리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벌써 기대가 만땅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행사를 알리는 사진이 보인다.
내 어렸을때의 모습과 교차되면서
흑백사진이 내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해방되고 얼마 안있어 전쟁이 났으니
얼마나 정신이 없었을까?
피난하는 모습에서 당황하는 모습도 보이는것같고
더군다나 가는 길목마다 피란민이라는것을
증명해야하는 고초도 겪었다고 하니..
그때의 어려움이 눈에선하다.
저렇게 천막이라도 칠수있는 공간이 있다는것만으로도
행복했을까?
산꼭대기에 피난처를 정한 사람들은 먹을물과 화장실해결이
안되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사진에 보이는 저 하천들도 결코 깨끗하지는 못했으리라.
물을 길러 2~30분을 걸어가서 겨우 한동이 길어오는
아낙네의 삶이 애달프다.
진지해줄수밖 없는 사진들..
우리의 아픈 역사를 들여다 본다.
판자집에 덕지덕지 붙은 집이다 보니
불이 나면 대형화재..
어려운 살림에 이런 대형화재는 더욱 어려움을 더하고
그때 그사람은 어찌 살았을까?
우리 부모님의 세대에는 말이다..
먹고 사는게 젤 급한 문제였을터.
미군부대에서 빼돌린 많은 물건들이 국제시장에 가득하다.
그때도 어려운사람들 사이로 돈을 번 사람이 있었겠지.
돈을 세는 사람의 모습이 이채롭다.
구호물품 하나에도 모든것을 다 가진것같은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에서
잠시나마 어려움속에서 천사의 모습을 본다.
천막학교를 재현놓았다.
학교는 유엔군 주둔지나 병원으로 내어주고
학교는 이렇게 야외에 천막을짓고 공부를 하는 곳이
많았다고 한다.
부모는 못먹고 못배워도 아이는 가르쳐야한다는
마음이 그때도 여전해보인다.
아~나는 그래도 비바람을 막을수 있는 실내에서
교육을 받았으니 행복했구나..
임시수도기념관건물로 들어섰다.
상시기념관이라 체계적으로 잘 꾸며져있었다.
먹고사는게 젤 급선무였으니
저렇게 가슴에 구직이라는 글을 써붙이고
기다리고 있을수도 있었겠다 싶은 생각이든다.
남루한 옷차림 피곤해보이는 눈빛.
그때는 그랬으리라..
판자집..
저 판자집이 비를 피할수 있었을까?
추위를 견딜수 있었을까?
그래도 저런 판자집이라도 있었다고 행복했었으라.
가족들이 한데모여 누울곳이 있었다는것만으로도 행복했을수도 있었겠다라는
생각도 해본다.
판자집 안에는 그릇몇개와 이불보따리.
급하게 피난온 사람의 모습이란다.
저것이 그들의 살림의 전부였던때가 있었겠지..
지금은 부산의 대표음식이 되었지만
그때는 허기를 달래기위해 먹었던 음식이라는데..
다방의 테이블에는 컴퓨터로
당시의 노래를 들을수 있도록 해서 터치를 하면
그때유행하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노래 가사 곳곳에 그때의 삶의 애환이 담긴 가사로 가득하다.
이 노래로 시름을 달래지 않았을까?
임시수도로 쓰였을 당시의 대통령관저다
사빈당이란다.
집무실
뒤돌아서는데
왠 사람이 앉아있어서 깜짝 놀랐다.
인형으로 이승만대통령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은 세면실이 구려보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최고의 인테리어가 아니였을까 생각된다.
대통령이 쓰는 세면대인데..
돌면서 이렇게 스템프로 관람을 확인시켜 준다.
재미있는 아이템이다.
다보고 나오니 계단이 보인다.
그 계단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어서
한컷 남긴다.
일명 쪽자..
나도 많이 해먹었던 기억이..
이렇게 임시수도기념관의 관람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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