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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먼지가 들려준 이야기

인생홈런 2016. 9. 9. 13:32

먼지이야기

- 별과 눈사람



" 난 내가 혼자 건너가야 할 이 생의 바다를 그렇게 불러요.

슬픔 또는 내가 할 수 있는 바의 다함의 바다라고...

이 생에서 오래 참고 오래 기다린 뒤에 이 슬픔의 바다를

다 건넌 뒤에 그 때에 내가 진실로 사랑을 알게 되리라는 걸 "




-먼지가 들려준 이야기-


나는 내가 하잘 것 없는 먼지라는 것이 슬펐다.

분명 존재하지만 쉽게 드러나지 않는 삶......

한심한 내 운명에 화가 치밀어 내 앞을 막아서는 유리창에

이마를 부딪혀 봐도 내 흐릿한 존재감은 유리에 실금 하나

남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땅에 엎드린 맘 착한 흙알갱이들 처럼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속 편하게 나무를 키울 수도 없었으며

어쩌다 열린 문틈으로 '안'이라는 곳에 날아들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나를 쓸어 담아 다시 밖으로 내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신은 왜 나를 만드셨을까?

나는 약하고 외톨이에다 완벽한 천덕꾸러기였다.

크게 상심한 나는 그 어떤 정주도 포기한 채 길을 나섰다.

나는 바람을 타고 내키는 대로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지치면 따뜻한 빛이 새어 나오는 창틀 속에서

잠시 몸을 쉬거나 운좋게 '안'으로 숨어들게 되면

낡은 가구 뒤 켠에 누워 죽은 듯이 잠을 잤다.


그렇게 세상에 대한 분노를 허옇게 키워가던 어느 날...

나는 방 안에서 누군가에게 서 떨어져 나온 흰

머리카락과 만나게 되었다.

내가 음지에서 숨을 죽일 때 녀석은 검은머리에 감겨

호사를 누렸음에 틀림 없었다.

나는 심술이 났다.


"너도 참 신세가 딱하게 되었다. 주인이 널 버린 모양이구나?"

가시돋힌 빈정거림에 흰 머리카락은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글쎄.버림받았다기보다...다한거지..내가 할 수 있는 바를



다 해버린 거라구. 모두 태워버리고 나면 하얀 재가 남듯이

나도 남김없이 태워버린 거라구."


그 가당찮은 평온함에 조금 놀랐지만 나는 녀석의 불행을

확인시켜 주고 싶어졌다.



"어쨌든 넌 버림 받은 거야. 네가 검고 윤기있었을 적엔

네 주인은 너를 조심스레 빗기고 매만졌겠지, 하지만

이제 색이 빠지고 볼 품이 없어지니까 널 버린거야.."

흰 머리카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담담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누구를 위해 있었던게 아니야..

나는 내가 원래 가지고 태어난 쓰임대로 쓰이다

이제 그 쓰임이 다한 것 뿐이야."

"쓰인다고? 누굴 위해 태어난 건 아니라며?

그 봐..아무리 부정해도 세상은 결국 불공평하다구..

만약 쓰는 자와 쓰이는 자가 따로 있다면

나는 쓰는 자가 될꺼야."



"여보게 친구..세상에 '쓰기만 하는 자'는 없어,



쓰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궁극에는 쓰일 따름이지..

우리는 서로를 위해 쓰일 따름이야..

그게 세상이 아름답게 유지되는 이치라고 들었어."

"나는 동의할 수 없어. 나를 보라구.

나는 약하고 외톨이에 더러워.

사람들은 나를 보면 훅 불어버리거나 쓸어내어버리지.

나는 도무지 쓰일 곳이 없어.."

밀려오는 비애감에 나는 갑자기 슬퍼졌다.

내 슬픔의 체적을 아는 지,

흰머리카락은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친구..어쩌면 자네야 말로 세상 어느 것 보다

숭고하게 쓰이고 있는 건 지도 몰라.


좀 우습게 들리겠지만..자네는 사람들을 근면하게 만들어..

자네가 없었다면 세상에 청소라든지 빨래라든지 목욕같은

일상의 근면들도 없었겠지..

그리고 이건 좀더 아름다운 쓰임인데..

가끔 메마른 심장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 뛰어 들어

눈물을 만들어 내잖아.


사람을 눈물 짓게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지

자네도 아마 알거야.."

"에~이,하나도 아름답지 않아.

사람들은 그런 일 따윈 단지 성가시게 여길 뿐이잖아.

게다가 그 때문에 모두 날 싫어한다구."


"더 중요한 게 있지..늦가을 북서풍이 몰려 올 때 밖으로

나가 보게..아마 바람이 자넬 아주 높은 하늘로 올려 줄 꺼야..

거기서 자네 친구들과 함께 몸이 아주 추워 질 때까지

견뎌보라구..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가 오면

자네를 만나러 구름이 바다를 건너 올 꺼야..


그 구름은 자넬 꼭 껴안아 지상으로 돌려 보내줄거야.."





"눈!!..눈으로 내리게 되는 구나!"





"그래..자네는 세상을 덮게 될거야..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산과 들은 자네들로 인해

한동안 쉬며 봄을 위해 숨을 고르게 될꺼야."

"근사해..상상도 못했어."

순간 장농 다리 아래로 수수빗자루가 쓰윽 들어오더니

나와 흰머리카락을 쓸어 내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 없는 버려짐.

하지만 나는 더이상 버려지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하찮아 보이는 내 존재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작은 질료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창 밖으로 털려지고 바람에 나부껴 내가 하늘로

오를 때 고요히 아래로 떨어지던 흰 머리카락이 두손을

입에 모으며 외쳤다.

"친구!! 사람도 산도 들도 오래 곰삭아지면 모두 먼지가

되는 거야.. 자네도 아마 예전엔 큰 산이나 나무였는지도

몰라. 단지 자네가 기억하지 못할 따름이지.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자네처럼 먼지가 될꺼야...

자넨 이미 건넌거야..자네가 '할 수 있는 바의 다함의 바다'를.."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추락을 준비하고 있다.

내 안에 일렁이는 '할 수 있는 바의 다함의 바다'가

단지 '슬픔의 바다'만은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내가 당신 곁에 떨어질 때 당신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내다 버린 숱한 삶의 사리(舍利)가 눈이 되어

내린다는 것을 아마도 당신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출처 : 부경 사계절 좋은사람들
글쓴이 : 인생홈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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